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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아카데미 NOW/Column

[column] 가나안 성도는 정말 '갈 길 잃은 사람들'인가? -오수경 간사

[크로스로 기고]


 가나안 성도는 정말 '갈 길 잃은 사람들'인가?


-오수경 (청어람아카데미 간사)


지난 425일 목회사회연구소에서 주관한 <가나안성도 세미나>에 참석했다. 가나안성도 316명을 설문조사하고 18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분위기가 상당히 뜨거웠다. 영미권에서는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 또는 교회 없는 기독인(unchurched Christian)’이라 부르며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가나안성도라는 용어가 아직 낯 선 만큼 가나안성도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입장 정리가 아직 덜 된 느낌이다. 앞으로 가나안성도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한 마음을 품고 <가나안성도 세미나> 이후 맴도는 생각의 조각들을 모아 남겨본다.



자식이 집을 나간 이유는?


행사 제목은 이랬다. “가나안성도-갈 길 잃은 현대인의 영성

나의 속마음은 그랬다. “가나안성도는 갈 길을 잃은 사람들 인건가?”

고백하자면, 나는 난민 그리스도인이다. 3년 전, 지옥같은 교회 분쟁을 겪다가 비자발적+자발적 동기에 의해 2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 한동안 여러 교회를 탐방하다가 지금은 C교회 미등록교인으로 2년째 암약하고 있다. 교회를 떠나지 않고 계속 다니되, 소속은 없으니 난민이며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난민교회인 셈이다. 가나안성도는 아니지만 가나안성도의 유형과 단계를 나눈다면 나도 어쩌면 넓은 의미의 가나안성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성도-갈 길 잃은 현대인의 영성이라는 행사 제목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가나안성도에 대한 행사 제목과 나의 인식의 차가,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나안성도 논의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나안성도를 이야기할 때,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탈 혹은 방황으로 규정할 것인가, 새로운 흐름 혹은 저항으로 인식할 것인가. 전자로 규정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돌아오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후자로 인식한다면 무엇 때문에, 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물론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봐야겠지만 아직,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나안성도에 대한 인식은 양쪽이 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곧, 가나안성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착한 안타까움-쉬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발생할 수 있다. “청년 A가 있다. A는 얼마 전부터 교회로부터 독립 선언을 했다. 교회의 권위적인 구조와 피상적 공동체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A는 교회 밖에서 신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공동체는 A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방황하는 A가 속히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리겠노라 권면하며 기도를 했다이런 일련의 과정이 교회-가나안성도사이에 벌어지는 존재론적 갈등일 것이다. 교회는 가나안성도를 지금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올 영혼, ‘집 나간 자식으로 규정하고, 가나안성도는 꼭 교회에서만 하나님 믿어야 하나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탈출하여 다른 길을 모색하는 순례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백 번 양보하여 가나안성도를 집 나간 자식이라 생각해 보자. 자식이 집을 나간 이유는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고 자꾸 당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어머니, 어느새 피상적 대화만 나누게 된 형제들로 구성된 무늬만 가족구조에서 탈출한 것인데 그 이유를 살피지 않고, 집수리하고 맛있는 음식 잔뜩 차려놓고 이제 돌아와해서 돌아간다고 한들,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그 해피엔딩은 누구에게, 누구를 위한 해피엔딩인걸까? 조심스레 예측하건데 가나안성도 현상을 이해하고 접근할 때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접근부터 시도한다면 가나안성도 논의는 그야말로 행사 제목처럼 갈 길을 잃은논의가 될 것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 폭넓은 이해, 뼈아픈 성찰과 혁신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해피엔딩은 불가능한 법이다.

 

가나안성도를 바라보는 교회적 관점에 대해 아쉬운 점은 첫째, 교회가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주체적 신앙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일 때다. 교회에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요, 개인은 곧 교회다라고 배웠는데 왜 정작 교회 밖 그리스도인을 불편하게 여기며 교회라는 틀 안에서의 신앙을 앞세우는 것일까? 조금 더 다양한 의미의 교회론은 불가능한 것일까? ‘교회 다니다신앙하다는 의미를 건강하게 분리시키지 못하거나 경직된 교회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가나안성도를 신앙 탈락자로 성급하게 규정할 때 가나안성도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가나안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원인이나 우리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문제들에 대해 대충 뭉개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이다. 교회에서 치명적 문제들이 발생하여 절망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 다녀야지라는 교과서적 대답을 듣고 그렇게 수많은 문제들을 대충 얼버무리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 다녀야 한다면 우리는 왜 굳이 상처받으며 교회를 다녀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꾹 삼켜야 하는 순간이 반복될 때 교회와 가나안성도들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는 것 아닐까? 지금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가나안성도 현상은 교회 혹은 신앙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진화하고 있다. 질문은 점점 많아지는데, 답을 내줄 수 없는 생각의 빈곤함이 가나안성도를 더욱 힘차게 교회 바깥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을까?

 

이는 곧 너무 쉽게 가나안성도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머리 큰 성도들이 교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진단이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머리 큰 성도들라는 부정적 표현은 오히려 한국교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 아닐까? 성찰 없이 반복되는 교회의 구조적 모순, 수준 낮은 설교, 때로는 몰상식하거나 폭력적이기까지 한 교회 내 수많은 관계들에 문제제기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머리 크기 작거나 적당한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올바른 공동체인가? 그렇게 겨우 유지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까? 흔히 가나안성도 논의를 할 때 흔히 텅 비어버린 유럽교회의 공포를 떠올리며 한국교회도 결국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언급하며 위기의식을 공유하곤 하는데 성도들이 떠난 현상미래를 공포스럽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텅 비어버리게 된 원인대응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성찰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영미권 교회의 교인 숫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보다 다양한 형태의 신앙의 흐름들이 의미있게 전개되고 있는 현상 등을 폭넓게 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쉽게 책임을 지워 속 좁은 결론에 도달해버린다면 교회-가나안성도 논의에서 우리가 남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현실 가운데 목회사회연구원에서 조사한 소속 없는 신앙인 조서 결과보고서는 눈 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교회 이탈 전 출석 교회 상태라는 질문에서 42.2%교회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또한 교회를 떠나기 전 고민 기간은 6개월 이상(32.1%)이 가장 많았으며 교회를 떠나기 전 누구와 상담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없었다는 대답이 평균 46.5%인데 청년의 경우 평균을 10%나 웃돌았다. 그리고 의외로 교회를 떠나기 전 교회를 옮긴 경험이 없는 경우가 45.7%에 이르렀다. , 교회는 가나안성도를 이탈(탈락) 혹은 방황이라는 사건의 측면에서 인식하지만 사실 현재 공동체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누군가는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고민하며 교회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면, 가나안성도들의 교회와 신앙에 대한 견해를 점수로 환산했을 때 가장 높은 점수부터 나열하면 ‘1) 교회 안에서도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교회에 다녔을 때 신앙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3) 목회자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설교 말씀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신앙은 반드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이었다. 이 항목만으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가나안성도 현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성도가 되기까지 합리적 해답을 제시할 수 없었던 교회의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모순된 구조 개선에 실패하고, 다양성과 합리적 절차를 존중하지 않고,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사회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스스로가 낳은 결과일 수 있고, 어쩌면 가나안성도는 그런 한국교회 구조에 대해 강하게 항의 혹은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었군요!"

실제로 청어람아카데미에서 올 해 초부터 가나안성도를 위해 세속성자 수요모임을 진행하였는데 참석자들 상당수가 길게는 7, 짧게는 몇개월 정도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성도거나, 교회에는 다니지만 형식적으로 다니고 있는 심정적 가나안성도였다. 그들이 가나안성도가 된 대부분의 이유는 교회구조에 대한 회의였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쉽게 나눌 수 없는 일방적이고 경직된 공동체 구조는 더욱 그들을 교회 밖으로 탈출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대해 가나안성도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들은 무엇에 저항하는가? 그리고, 왜 저항하는가? (중략) 가나안 성도 현상은 현재의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대표적 증상의 하나일 수도 있고, 혹은 이런 질병에 대항하는 항체를 형성해나가는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이 동시에 고찰되지 않고, 손쉽게 폄하해버리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라고 평가 한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의 지적에 공감한다.

 

425일 이후, 가나안성도 세미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에 대한 가장 주된 반응은 이랬다. “,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군요!” 우리는 이 반응에 주목해야 한다. 가나안성도 현상은 이미 담을 넘었고, 문을 열어 재꼈다. 이제 한국교회는 가나안성도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문제를 풀어갈 때 한국교회가 가나안성도 현상을 교회적 입장에서 벗어나 가나안성도 입장에서 진지하게 주목하길 바란다. 다양한 시각, 온도차가 존재하겠으나 가나안성도 현상은 신의 존재에 대해, 신앙의 의미에 대해, 본질적 의미의 교회에 대해 더 깊이 탐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새로운 신앙 흐름의 탄생일 수 있다.

 

가나안성도 현상은 전방위적이며 묵직한 질문들을 품고 있다. 바라기는 가나안성도 현상을 직면할 때 그들을 어떻게 교회로 다시 오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그들이 던지는 근본적 질문에 귀 기울여 충실하게 대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가나안성도 현상이 던지는 질문(종교와 신의 의미, 교회의 존재 의미에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교회 흐름의 가능성 등)의 깊이에 비해 아직 교회의 고민은 단순하며 대답은 그리 깊거나 정교해보이지 않아 아쉽다. 생각과 성찰의 빈 곳을 착한 탄식과 익숙한 대처, 쉬운 결론으로 성급하게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크로스로(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7)에도 기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