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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아카데미 NOW/Column

한국 기독교에 없는 것 ③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2) 자원동원

꿈이 현실의 장벽 앞에 무너지는 경우는 많습니다. 대개, 현실의 척박함을 탓합니다.  오히려 꿈이 충분히 자신과 주변을 흥분시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꿈이 파죽지세로 감염자를 넓혀 갈만큼 전염성이 강하지 않았거나, 시대적 변화를 응축해낼 만큼 제대로 파괴력을 갖지 못한 것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를 거스르는 운동을 하자면 단지 돈을 부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돈을 부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 운동의 흐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니, 결국 운동의 방향과 힘은 슬로건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구나 실감을 했습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가장 아픈 경험 하나는, 제가 아끼던 복음주의 운동의 부문이 얼마나 허무하게 문제 앞에 무너져버리는가를 보았던 일입니다. 일견, 진정성이 있고, 순수했다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순수함에 절대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겠더군요. 계속 진정성순수함 갖고 있은들, 시대정신에 볼모 잡힌 신세를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데 무슨 대안 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선교단체의 간사들, 교회의 부교역자들, 여성 사역자들, 직원들의 일방적 희생 위에 하나님 나라를 멋지게 건설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의문입니다. 사람 희생시켜서 얻은 결과를 하나님이 즐겨 받으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희생은 자원해서 값이 있는 것이지, 구조를 그리 만들어놓고 강요된 희생은 누구의 이름으로도, 특히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선교단체에서 일하고, 교회에서 일한 것이 그 인생의 가장 돋보이고, 보람 있는 시간이 되어야 마땅하지요. 그 시간이 보상받지 못한 원성과 분노가 서린 시간이 되어선 곤란하지 않습니까?  

한국 개신교 성도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헌금 열심히 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오죽하면,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의 열성 덕분에 한국이 세계에서 부금을 가장 열심히 내는 나라로  ‘통계가 잡힌다 합니다. 교회 내에서 동원되는 막대한 재정이 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있게 사용된다면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의 헌금지출에서 전도선교 등 교회와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 일 외에 대외적 지출은 매우 인색합니다.  

기독운동이 새로운 장을 열려면, 전통적으로 대형교회와 유력한 어른들에 의존해온 재정모금 방식에 일대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누가 자원을 동원할  있느냐가 한국개신교의 지형을 형성해 왔습니다. 소위 교계정치는 사실상 말을 갖고 있는 세력이 어떻게 돈을 갖고 있는 세력을 자기편에 것인가의 쟁투입니다. 결국 돈을 갖고 있는 세력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방식으로 연대는 형성됩니다. 새로운 기독운동이 구체제와 차별성을 가지려면, 최소한 재정적 기반의 존재양식부터 달라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잡지 편집장을  적이 있습니다. 잡지가 사양산업이라는 , 독자들의 수준이 낮아졌다는  여러 가지 변명거리가 많았지만, 솔직한 판단은역량 부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능력을 보여달라 우리는 착하다 말하는 것은, ‘이게 옳으냐 물을 이게 인기다라고 답하는 것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역량이 뛰어난 천재 하나가 나타나서 해결해 있는 문제라면 모르겠으나, 전방위적 인프라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란 점 앞에서는 망연자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지적 인프라도 없었고, 유통의 인프라도 없었고, 강력한 수용자 그룹 인프라도 갖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한줌밖에 되는 공급자들과 그들의 한두 다리 건넌 지인들이 다수를 이루는 수용자들간의 폐쇄적 담론유통구조는 도무지 확장될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뇌리에 박혔던 것은 “우리가 제대로 운동하려면, 일차적으로 운동가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질적 업그레이드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적어도 매달 10,000원씩 내는 후원자가 10,000명은 되어야 내셔날 레벨의 운동이 가능하다 생각이었습니다. 실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미국이나 영국을 다니면서도 확인할 있었습니다. 나라의 성공적인 대안운동들은 생존모드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10,000명의 후원그룹으로 보았습니다. 10,000명이 만들어내는 후원금의 규모도 의미가 있겠지만, 사실은 어떤 운동을 동의하고, 지지하고, 이를 위해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10,000명 있다는 것이 더 큰 자산이란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의 복음주의운동에는  10,000명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소위 천만 기독인 가운데  명이 안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나름 의식 있는 교회 성도들만 모아도 만 명은 쉽게 넘기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산산이 흩어져 다들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면 명이 아니라, 십만 명이라도 맥을 추지 못합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확인합니다. 수만 명이 모여드는 기독교 사이트들이 있습니다만, 주로 찬양이나 목회자료를 공급하는 정보사이트입니다. 소비자로 드나드는 공간은 있을지 모르나, 연대하고 참여하는 장은 1,000명 대를 넘기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 단지 종교 소비자(religious consumer)로 존재합니다. 임계점(threshold)을 넘기지 못한 운동은 용을 쓰다 주저앉곤 하길 반복하다 수도 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우리에겐 임계점을 치고 올라갈 폭발력 있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운동은 충분한 시행착오와 검토를 거친 설계도를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원을 하나씩 장착해주면, 성능을 발휘하고, 작은 성공과 성취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감을 되찾도록 견인할 있어야 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배포와 전망을 그려낼 있어야 합니다.  

의미 깊게 들었던 말입니다  “운동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능한 것을 하는 것은 관리능력(management)에 달린 것이지만, 운동(movement)란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개인적 신앙에서 임계점을 넘긴 10,000명의 전격적인 등장이 현재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을 세속성자(secular saints)’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그들이도래하도록 힘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지금 한국 복음주의운동, 혹은 한국 개신교의 핵심과제라고 감히 지목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판단을 물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에 없는 것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1] 기독운동, 못해먹겠다
[2] "그럼 뭘 해야하는가" - 1. 지식창출
[3] "그럼 뭘 해야하는가" - 2. 자원동원
[4] "그럼 뭘 해야하는가" - 3. 영성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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