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전자료/청어람 VIEW

프린스 카스피언, 그리고 아슬란의 부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니아 연대기 - 프린스 카스피언을 봤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니아 연대기를 구성하는 7개 작품중에서 프린시 카스피언은 두번째이기도 하고 (저작순서로 볼때) 네번째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연대기순으로 볼때)
아마도 영화화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몇몇 작품들은 건너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끊임없이 내용이 뭐냐고 묻는 우리집 아그들(7세, 5세)의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무척이나 긴장하며 많은 것을 느끼며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웬지 모르는 흥분과 감상과 밀려오는 상념들로 세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집중하게, 그러면서도 불편하게, 깨어있게 했을까?

제 주관적인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아무튼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영화적인 면에서 평이 않좋더라도 보는 내내 무언가 생각하게 해준다면 그 영화야 말로
좋은 영화인 셈이지요.

좀 차분히 생각해 보니 몇가지 실마리가 잡히기는 합니다.
가장 먼저 신경이 쓰인 것은 텔마린 사람들과 나니아 사이의 첫번째 대결이었습니다.
피터는 앉아서 당하지 말고 먼저 공격하자고 나니아인들을 설득하고
멋진 기습공격을 펼칩니다. 그러나 역습을 당하게 되고
예전에 황산벌에서 봤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러니까 성안으로 공격하러 들어갔다가 성문이 닫히고 그 안에서 몰살당하는
처참한 패배를 맡보게 됩니다. 끝까지 닫히는 성문을 버티고 서있는 미노타우루스의 희생 덕분에
적어도 절반은 도망쳐 나올수 있었지만 도망쳐나오는 피터에게 성에 갇힌 나니아인들이 소리칩니다.
"어서 도망가세요. 우리는 아슬란을 위해 죽겠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수 많은 사람들(Narnian이 사람은 아니지만...)이 죽게 되는 상황,
리더쉽이란 무엇인가, 결단이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지도자의 한번의 판단의 실수가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사실들...
그렇지만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아슬란의 부재입니다.

어쩌면 그 한가지 사실이 영화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1300년동안 나니아를 우연이 들어오게 된 텔마린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히게 내버려둔
아슬란, 그리고 그를 위해 죽겠다는 나니안들...

'사자, 마녀, 옷장'에서도 아슬란은 하얀 마녀에게 고통당하는 나니아를 버려둡니다.
좋게 말하면 때가 될때까지,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의 아들딸들이 나타날때 까지.
그리고 그들이 떠나자 아슬란도 사라지고, 나니아는 다시 또 다른 아담과 이브의 아들딸들인
텔마르인들에게 짓밟힙니다.

영화 속에서는 마지막 순간 아슬란이 나타나 결국 적들을 물리치지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왜 아슬란은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요?

요즘 생물학-유전학-DNA 관계된 책들을 연이어 읽고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에덴의 강, 조상이야기(여기까지 도킨스)
진화하는 진화론-종의기원 강의, 제너시스-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그리고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과 DNA: 생명의 비밀
이것이 지난 석달동안 읽어 온 책들입니다.
이 책들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다음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 책들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생명현상이란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해 (그리고 성선택을 통해)
누적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화학현상이다라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생명현상의 특이점이란 없고 생명이라는 것은 DNA에 담겨있는 유전부호로,
그리고 그 유전부호라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화학적인 현상으로 환원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파도의 부딛침이 아름다운 해안의 절경들을 만들어 내고
오랜기간의 침식과 풍화가 그랜드캐년이라는 장관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생명의 신비도 그저 오랜 세월을 걸쳐 사소한 변이들이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생명현상은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변이를 낳게 되고 그 변이가 한편으로는
더 나은 발전으로 한편으로는 자연선택에 의한 멸절로 이어집니다.
한편에 탁월한 천재와 기술자들,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있을때
다른 한편으로는 유전적인 결함으로 고통당하다 사라져가는 수 많은 어린 생명들이 있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짐작이 되던 예전에 얼핏 보았던 책 제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기도해서 벼라별 응답을 다 받는다는데
이 세상에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해주는 그러한 신은 어디에 있을까요?
때에 맞춰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전능한 손길은
김선일 형제에게도 없었고 배형규 목사한테도 없었고
600만의 유태인들에게도 없었고
세습을 하던 뭘 하든 잘만 굴러가는 한국 교회에도 없는 듯합니다.

아무튼, 영화는 아슬란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마무리되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웬지 그 포효 소리는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판타지가 판타지인 이유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들여다 보게 해주는 상상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타지가 판타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상상의 세계는 현실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상상이 상상속에 머물때
그 상상의 세계와 단절된 현실은 어쩌면 더 비참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예언자들의 선포가 있습니다.
결국 그 선포들이란 하나의 변할수 없는 역사적 현실,
즉 서남아시아 일대를 휩쓴 대 제국시대에 약소국이 처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이 되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
요행히 앗수르를 피해도 결국은 바빌론에게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선지자들이 부르는 애가는 그 공허함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한 몸부림은 아닌지

구원을 기대하는 유다인들에게 예레미야가 할수 있는 이야기는 피할수 없는 "심판"
의 선포뿐이었습니다.
피땀흘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때 쳐들어오는 대적들을 향하여 느헤미야가 해야 했던 일은
미스바의 사무엘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와 공구를 함께 쥐고 두 눈을 부릅뜨며
성벽을 쌓는 것 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떠오르는 성경말씀은
시편 74편의 어느 한 구절이었습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그런데 왜 기도하는 걸까? 그런데 왜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신의 부재 앞에서 여전히 신을 찾는 그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요즘,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그저 모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시 언젠가 깨닫을 날이 오려는지...

영화때문인지, 영화와 상관없는 연상의 끌림인지 나의 카스피언 왕자는 그렇게
나를 이끌고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