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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좌담] '기독교 문화'를 바꿔 (정정훈, 박준용, 홍정은, 한윤아, 정종은)

[200호 문화좌담] ‘기독교 문화’를 바꿔
입력 : 2007년 05월 14일 (월) 15:07:30 [조회수 : 9454] 복음과상황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어느덧 <복음과상황>이 200호가 되었다. 창간호부터 199호에 이르기까지 ‘문화’는 <복음과상황>이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중요한 주제였으며, 또한 <복음과상황>이 기독교 문화 담론에 일정한 기여를 해온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200호를 기점으로 하여 <복음과상황>은 기독교 문화 담론을 보다 구체화하고 심화하고자 하고 있다. 새로운 출발에 앞서서 문화섹션 편집위원들이 모여서 ‘기독교와 문화’라는 주제로 난상토론을 진행했다. 

<복음과상황>과 나

   
 
  ▲ 정정훈 ⓒ복음과상황 신철민  
 
정정훈
오늘 좌담은 기독교와 문화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문화섹션 편집위원 내부에서 어떤 방향으로 이 섹션을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총론적인 편집회의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문화섹션 편집위원들은 모두 문화 연구/문화 이론을 전공하거나 문화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자 기독인들이다. 일단 편집위원 각자가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나누어 봤으면 한다. 특히 <복음과상황> 문화섹션에 왜 참여하고 있는지, 이 잡지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이야기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박준용 소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상이나 생각, 신학적인 부분은 진보적이면서도 문화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이들을 적잖게 만날 수 있었다. 굉장한 모순인데 그게 모순인 줄 모르더라. 보수적인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삶의 반영으로서의 문화를 매개로 경직된 사고의 틀을 확장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삶과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참여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복음과상황>이 독과점 매체라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문화를 말하는 매체가 전무하기 때문에 예민한 쟁점을 다루고 있는 영화나 트랜드에 대해 공론화시킬 수 있는 장이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복음과상황>의 문화 지면이라는 장도, 좀 길긴 하지만 탐색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변화를 강제하기 보다는 조금 수동적이긴 하지만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마음으로 리뷰나 좌담회 등의 독자 친화적인 형식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독청년들과 소통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종은 2004년부터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참여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자면, 2004년 당시 편집장이었던 양희송 실장(청어람)을 포함해서 서울대 학부에서 <틈>지를 만들 때 도와주시던 선배들, 그리고 복음주의권의 좋아하는 선배들이 <복음과상황>에 많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랑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학부 때부터 기독인 연합 활동을 통해 <복음과상황>을 접하면서, 청년들이 볼 때 고민하는 느낌도 있고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잡지라는 점에서 기대가 있었다. 

현재는 미학과 대학원에서 문화 연구를 공부하고 있는데, ‘문화’라는 게 여러 정의가 있지만 나는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에서 ‘의미화 실천’으로 문화를 정의하는 데 동의한다. 의미화 실천은 뜬금없이 나오는 게 아니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람들의 의미화 실천이 모여서 이미 어떤 구조를 만들고 있고, 또 나는 그걸 발판으로 의미를 창출하는 상징적인 실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이미 짜여 있는 구태의연한 실천의 방식을 따라가게 된다. 즉, 의미를 담보하는 구조와 실천이 끊임없이 뒤엉켜 있는 것이 문화의 상태이며,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감옥이랄까. 그러나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은 아니다.

문화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은 아니라는 말이다. 억압 없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교회들이 한 가지 가능성만을 기독교 문화 담론의 전부라고 가르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문화에 대해 생각하고 기독교 문화의 현 상황을 반성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본다. 예컨대, 교회 문화의 합리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의제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홍정은 대학 3학년 때 쯤부터 <복음과상황>을 보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시기는 한참 기독교세계관 논쟁 있을 때였고 그 당시 나에게도 도전이 되었던 글들이 있었다. <뉴스앤조이>와 통합하고 격주간지로 나오면서부터는 자연스레 눈에서 멀어졌다. 다시 월간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더라. <복음과상황>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하자면 <복음과상황>은 계속 존재해야 하고 해왔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는 <복음과상황>에 참여할 기회가 있으면 참여하는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복음과 상황이라는 이름이 주는 당위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배웠고 신념으로 여겼던 바가 복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즉 콘텍스트도 함께 붙잡고 가야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아마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당위성을 가지고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또한 조금씩 발을 담그게 되면서 <복음과상황>이 새롭게 시도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새로운 흐름에 합류하여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복음과상황>의 문화섹션이 어떤 새로운 흐름을 탈 것인가를 생각해봤을 때 이전과는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전까지는 <복음과상황>의 문화섹션도 문화를 좁은 의미에서 엄격하게 보고 접근했다고 여겨지는데, 나 같은 경우는 문화를 광의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문화란 이러이러한 영역이다’라는 식으로 테두리 짓기보다 ‘인간의 삶의 모든 양식’으로까지 통칭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문화의 정의에 대한 태도는 나이브하지만 넓은 테두리 내의 다양한 것들에 대해 세밀하고 분석적으로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다

   
 
  ▲ 한윤아 ⓒ복음과상황 신철민  
 
한윤아
98년도에 편집위원이었던 유재희 선배가 <복음과상황>을 소개하면서 영화평을 쓰라고 해서 3번 정도 쓴 적이 있다. <복음과상황>은 80년대엔 전투적인 분위기를 반영했고, 90년대엔 ‘교회 안의 지성인’이라는 복음주의권의 엘리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 영화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고 잠깐 잡지의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복음과상황>이 반영했던 그런 엘리트주의가 나와는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복음과상황>과 나의 인연은 ‘독자모임’이라는 이름의 인적 네트워크와 관계가 있었다. ‘독자모임’에서 조금 더 비판적인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 여기 정정훈 편집위원 등 사람들과 같이 ‘좌변기’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기독교 문화와 관련된 활동은 90년대 후반에 유재희 선배와 함께 창천교회의 문화쉼터 중 영화 상영 부문을 기획하고 뉴스레터도 만드는 것이었다. 단편영화도 한 편 만들었다. 그 이후로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복음과상황>도 잘 못 읽어봤고 편집위원 섭외를 받고 <복음과상황>을 보니 지면·판형·내용이 일취월장했더라. 섹션들이 통일된 감각과 슬로건 없이 각자 아우성을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가능성이 있고 비전이 있기 때문에 <복음과상황>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왔다. 지난주에 얘기했지만 글이나 섹션이 얌전하다. 문화면은 ‘리뷰’하는 것보다는 선언적인 태도, 캠페인의 형식을 취했으면 좋겠다.

 다시,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정정훈 기독교 문화란 말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고 관련된 실천들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라는 말을 구성하고 있는 두 항인 ‘기독교’와 ‘문화’는 여전히 그 의미가 명쾌하지 않으며, 두 항이 결합된 ‘기독교 문화’ 역시 그 개념이 아주 명료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복음과상황>을 통해서 기독교 문화 혹은 기독교와 문화에 관한 논의를 풀어갈 때 어떤 맥락에서 그 작업을 해야 할까? 먼저 각자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정종은 위원은 문화를 ‘의미화 실천’으로 이해한다고 했는데.

정종은 의미화 실천을 위해서는 일단 재현체계가 필요하다. 즉, 내가 중요시하는 문제와 화제, 가치와 사건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재현하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재현체계는 그 체계에 어울리는 바람직한 인간의 위치를 상정한다. 그러한 행위주체의 위치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재현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체계에 끌려갈 수도 있고 반대로 체계에 파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가족, 교회, 친구집단 등이 제공하는 재현체계는 상이할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이 제공하는 주체의 위치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나름대로 ‘접합’시키면서 자신의 주체의 위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구성해내는 주체의 위치는 기존의 재현체계들이 제공한 위치에 종속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 구조뿐만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개념이 ‘의미’의 생성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과 ‘상황’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현재 노출되어 있는 재현체계들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체계들로부터 도출되는 바람직한 주체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재현체계를 대안적으로 제시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결국 ‘세상이 어떠한가에 대한 재현’으로서 믿음과 ‘세상이 어떠하기를 우리가 원하는가에 대한 재현’으로서 욕망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가 문제이다. 그걸 우리가 동의해야 전진할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미뤄왔던 거다.

정정훈 의미화 실천은 결국 기존의 의미화 체계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고착될 수도 있고 다른 체계와의 접합을 통해 기존의 체계를 전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보수적 의미화 실천과 전복적 의미화 실천을 수행하는 주체는 자신의 행위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러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을까? 특히 <복음과상황>을 만들고 있는 우리의 경우에는 주체의 가치 판단 기준이 기독교라는 항인데, 그게 우리에게 언제나 명확한 것일까?

정종은 일단 나의 경우에는,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내가 정의한 복음이 있고 내가 왜 기독교인인지에 대한 답이 있는데, 이것들이 앞에서 말한 실천을 하는데 제약이 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책을 읽으면서도 부딪치는 지점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같이 만들기로 한 사람들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 그렇다고 각각이 믿는 바를 잘라내고 바꾸는 건 아니겠지만, 함께 만들기 위해 좀 더 물러나거나 좀 더 나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 박준용 ⓒ복음과상황 신철민  
 
박준용
현실적으로 삶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문화가 실제 현실에서 이슈가 되는 것은 문화예술 콘텐츠 등을 통해 구현된다고 본다. 문화실천적인 전략, 전술인 측면에서 범위를 좁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예라고 하면 기초예술과 대중문화가 포함된다. 특히 대중문화는 다양한 신념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각축장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문화적 논의 범주를 기초예술, 대중문화, 그리고 각종 문화 트랜드에 맞추어서 전개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독교와 문화라는 부분에 관한 논의는 다소 ‘신앙고백’ 플러스 ‘커밍아웃’ 분위기가 나는데 나에게 있어 기독교는 거의 제약이 없다. 주로 비기독교권의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일들을 하는데 내가 기독교신자라고 하는 사실이 어떤 제약이 되는 경우는 없다. 내게 있어 기독교적이라는 개념은 곧 하나님의 마음, 뜻, 의지, 성품의 발현이다. 종교적 틀 안에서 좁게 재현되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찰력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일반 예술가들의 통찰력 가운데 중첩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기독교적인 관점이 자유와 상상력을 억압하거나 축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여유를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 나랑 관점이 다른 이들과 공감적인 소통을 이루는 힘이 된다. 내 정체성은 기독교인이니까 그 정체성을 갖고 문화영역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윤아 교회 안에서 감각적으로 훈련된 ‘문화’를 다루는 태도는, 개인에게 선구자적인 임무가 주어지고, 문화라는 것은 내가 바라보거나 판단하거나 바꾸거나 참여하는 걸 결정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등부 시절에 <휴거>라는 종말론적 책이 유행했다. 지금 보라고 하면 촌스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을 키치적인 표지였는데, 당시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판단이 정지되고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신앙과 관련된 담론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 목사이거나 선생이거나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강한 힘을 가진다. 중고생 시절에 교회 선생님이 <낮은 울타리>를 들이대면서 “영화를 좋아하는 너는 이걸 봐야 한다”고 했다. 착한 내 동생은 청계천에 가서 출시도 안 된 LP를 사던 음악 마니아인데 그 잡지를 보고 판을 다 버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지만 추억으로 치부하기엔 분노가 생긴다. 약한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들었다는 것이 말이다. 

내가 문화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었다. 그 개념에 따르면 내가 문화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문화가 나를 구성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기독교) 문화는 어떻게 구성되고 그 구성 논리는 무엇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화는 테두리가 선명하지 않은 장인데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조건이고, 어떤 문화에 대한 논리(이론)도 있고, 그것을 인증해주는 기관이나 제도도 있고 모든 것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는 ‘문화’를 선험적으로,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만 했던 것 같다.

박준용 이데올로기 각축장으로서 단위 콘텐츠를 이해해 본다면, 나는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 콘텐츠에 내재된 가치와 신념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사고와 경험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 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좁은 의미에서의 기독교성을 가지고 이른바 기독교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한윤아 아까 얘기했듯이, 한국교회는 이성적인 판단이 정지되는 경험을 주고, ‘기독교적’이라는 언어나 주장이 한 사람의 선택이나 판단을 완전히 결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주체에 대해서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엘룰이었다. 엘룰은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인 존재’로, 천국과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변증법적인 존재’라고 했다. 양립하는 모순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관점이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지금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충격이었던 것은 내가 사실 판단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그게 나를 구성하더라는 것이었다.

박준용 전통적인 기독교세계관의 폭력성은 나도 알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단지 기독교적인 수사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소통이 제한되기 때문에 더 문제가 생긴다. 전략적 차원에서 용어의 해체와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가진 예수, 문화에 대한 개념도 진행형이지만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설치하고 일시적으로라도 정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그 범위가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하는 진행형이란 개념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문화라는 콘텐츠를 통해 확장을 모색하는 것이다.

정정훈  지금 우리 논의는 기독교라는 장 속에서 기독인들이 소위 ‘세상의 문화’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로 넘어갔는데, 한윤아 위원은 엘룰의 변증법적 입장을 선호하고, 박준용 위원은 문화에 관한 기독인의 입장은 계속 변화해가는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인가, 다만 잠정적인 정주가 필요한가?

박준용 그렇다. 문화에 대한 입장을 확정하고 소통하는 게 아니라 문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임시적으로 정주하고 있을 뿐임이 공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고착된 상태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론적으로, 해석의 장을 통해 설득시켜야 한다고 본다.

   
 
  ▲ 정종은 ⓒ복음과상황 신철민  
 
정종은
동의한다. 예전의 어떤 관점이 잘못되어서 극복하기 위해 대안을 생각해도,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가 극복해야 할 낡은 것이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유의미한 실천을 하려면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은 정주해야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내가 정주한 지점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문화 담론과 그 불만

정정훈 기존의 기독교 문화 담론들에 대해 어떤 불만이 있냐면 거기서의 문화개념은 너무 초월적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문화의 문제는 신학의 문제나 철학의 문제 혹은 미학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인데 기존의 기독교 문화는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요즘 CCM이 잘 안 되는 상황은 정확하게 한국 음반시장의 침체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CCM 레이블 역시 적당한 수익구조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는 디지털 기술부터 저작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경제학적 문제가 얽혀있다. 하지만 이런 문화의 물적 토대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문화 담론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박준용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문화적인 현상들에 있어 정치경제적 측면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를 담론화하는 방식이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그것과 문화영역에서의 그것이 다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경우 크게 현상의 반영으로서 문화 콘텐츠를 통해 다루는 방식이나, 사건을 야기한 동시에 이후 사건으로 인하여 파생된 문화현상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정치경제적 요인에 대한 논의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 홍정은 ⓒ복음과상황 신철민  
 
홍정은
정정훈 위원의 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은 개인적인 포지션 설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편집위원들이 동의할 해석적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도리어 정치적인 측면, 문화정치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앞서 말한 광의의 차원에서의 문화에 바탕을 두고 실천할 수 있는 영역들을 발굴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기독교 문화가 무슨 담론인지 모르겠다. 이른바 기독교 문화라고 통칭되는 것, 기독교 문화를 둘러싼 담론의 뚜껑을 열어보면 텅 비어있다. 담론 내의 상호 레퍼런스를 추적해보면 결국 지칭의 대상이 없다. 허공에 띄워 놓고 논의의 물꼬도 못 트고 서로 꼬리잡기하고 있는 격이다. 이걸 지우고 차라리 현실적이고 현장적인 이슈에 대해 말하는 게 옳지 않은가 말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좁은 의미의 문화 즉 영화나 드라마 같은 프리즘을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가 갖고 있는 프리즘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제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화를 굉장히 잠재적이며 우리가 도외시 할 수 없는 기본적인 구조 틀로 설정하고 그 현장에 대해 투입하는 차원에서 가는 게 옳지 않은가 싶다.

정정훈 우리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독교 문화 혹은 기독교와 문화에 관련된 글을 쓰는 주체의 입장이 충분히 드러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각자의 정치적, 이론적 입장 속에서 기독교 문화에 관한 생각들이 형성되는데 그런 구체적이고 특정한 입지점은 감추고 자신의 입장을 어떤 보편적 입장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대문자 주체의 위치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복음과상황>의 문화면은 글 쓰는 이의 위치와 입장이 잘 드러났으면 한다.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 쟁점화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글쓰기를 했으면 좋겠다.

박준용 입장이란 관점의 명료성이라는 측면에서 글쓰기 형식과 관련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글속에 다 드러나는 것인데. 관점이 좀 더 명료해야 하는 게 평론이라면 칼럼처럼 호흡이 짧은 글을 관점이 명료한 것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홍정은 관점의 명료성을 얼마나 자세히 제시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인 글쓰기의 형식, 주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문화칼럼을 쓰려고 할 때, 칼럼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글을 쓸 때 ‘나의 말을 나라는 주어를 쓰면서 말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이 있다. 물론 나라는 주어를 지우고 마치 제3자적 입장에서, 혹은 주어를 가리고 객관화된 단어와 문체로 글을 서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정훈위원이 말한 것처럼 보편화된 담론의 구현자로 글을 위치지우고 이는 앞서 말한 권력/힘의 구축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객관화된 정답을 말하는 주체가 아닌, 나라는 주관화된 언어로, 내러티브를 담지 하는 주체로 서술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이 경우 한 명의 필자가 고정적인 칼럼을 쓰지 않고 문화칼럼을 여러 편집위원이 돌아가며 쓴다는 난제가 있다. 여러 편집위원의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통일하여 주관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렇게 되면 객관화되고 권력화된 주체의 글쓰기와 다를 바 없어진다. 따라서 각각의 내러티브, 개인적 역사, 다양한 포지션과 상황을 담지하고 있는 편집위원 각각의 목소리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편집위원 각각의 글, 목소리가 여러 가능한 케이스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강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정훈 사실 글쓰기의 양식 혹은 스타일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실천이다. 이제 복음주의 진영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 볼 때가 됐다는 거다. <복음과상황>의 문화섹션에서는 그런 글쓰기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정훈 편집위원 각자가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고 복음주의 진영의 문화담론에 대한 불만이 뭔지 어느 정도 논의가 된 것 같다. 그럼 앞으로 우리가 <복음과상황> 문화섹션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얘기해보자.

정종은 정정훈 위원이 말한 것처럼 문화의 정치, 경제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문화를 주조하는 물적 토대라든가, 기저에 깔려있는 정치적 성향들을 지면에 반영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이 필요한 것일까?

한윤아 입장에 대한 토론보다는 ‘기독교 문화’라는 장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 안의 어떠한 문화 현상으로 드러나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요즘 대형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여러 대의 카메라로 예배 자체를 생중계한다. 목사님 뒤에 큰 스크린이 있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은 현실을 시각적 재현, 스펙터클로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대체로 편집의 컨벤션은 중심에 있는 목회자, 그리고 대응 숏으로 성도들의 다각적인 모습이 나온다. 즉, 예전에는 대형 교회의 건축 양식이 하나의 중심을 보도록 설계된 것, 그리고 그 자리에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공간 정치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영화적인 서사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만 말할 수는 없지만 교회가 고급 영상 설비들을 갖추기 시작하고,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훈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 이들은 늘 자신의 ‘은사’가 교회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강요받는데, 이 순간에 평소에 영상 문화에 대한 비판적 판단보다는 교회의 논리를 따라가 컨벤션을 재생산하게 되는 이상한 구조를 보게 된다. 교회의 문화 인프라에 대해 보자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미 소위 ‘세상’조차도 ‘공공성’의 논리를 따라서 문화를 바라보는 시민사회적인 판단을 한다. 예를 들어 문화관광부에서 주말 밖에는 사용안하는 교회의 공간, 장비 등을 주중에 지역 사회를 위해서 활용하는 기획을 공모 받아 자금 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교회는 지역 사회의 공공 자원인 것이다.

박준용 각성과 변화를 모색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교회 내부의 관습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게 의미 있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교회 내 문제에 대해 관심 있는 그룹이 있고 현실 문화에 대해 관심 있는 집단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고르게 반영되면 좋겠다.

오늘, 기독교 문화 담론에 필요한 것

정정훈 어떤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교적 관(觀)을 통해서 문화를 바라보려는 습속을 극복해야한고 생각한다. 기독교 문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문화적 문제와 관련된 기독교적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제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공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떤 ‘관’을 이야기하기보다 구체적인 문화적 장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실천, 사건, 사태들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박준용 나의 경우에는 인간과 비인간화의 문제가 중요하다. 내게 있어서는 인간화라 신념이 기독교적 가치이다.

홍정은 우려가 되는 건 우리가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고 기준을 정하면 그것이 또 다른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다. 어떤 담론에서든 담론에서의 기준과 전문화된 언설들은 하나의 표준이 되어버리고 이는 권력/힘을 낳는다. 특히나 기독교 내에서의 담론은 더욱 그렇다. 정답에 대한 욕구가 무조건적으로 강한 맥락인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내가 과연 ‘기독교적인 발언’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 없다. 편집위원 누구라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과연 기독교적인 이론, 분석틀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처한 콘텍스트도 여러 상황이 중첩된 상황이고, 이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분석틀도 중첩적일 수밖에 없다. 좀 전의 위원들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주한 단 하나의 관점이란 불가능하다. 기독교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답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정박하고 우리의 언어들을 위치지우는 것은 경계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답을 정하고 제시하는 순간 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자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준용  거듭 완료형의 확신이 아닌 진행형의 제한된 확신 속에 답할 뿐이다. 대책 없는 질문의 변화를 촉구하기 보다는 그 필요성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정훈 홍정은 위원의 말에 동감한다. 결국 <복음과상황>이 기독교 문화에 대해서 말한다면 최소단위로는 각각의 나름대로 기독교 문화를 구현하려는 6명의 편집위원이 각각의 케이스를 통해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정종은 케이스로 충분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면 순간적인 연결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같이 뭔가 만들 때 우리가 ‘함께’ 만들기 위해 조금 앞으로 혹은 뒤로 갈 때 비 필연적이지만 그 지점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다.

정정훈 문제는 그러한 동의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이다. 정종은 위원만 하더라도 문화를 이해할 때 비기독인들이 주조한 개념의 도움을 받고 있다. 스튜어트 홀의 접합 개념이나 텔켈 그룹 등에서 제기하는 의미화 실천 개념을 중요시 하지 않나. 그런데 우리 모두는 각자 중요시 하는 개념이 다르고, 그 개념을 산출한 입장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종은 일반은총의 견지에서 볼 때 기독인과 비기독인의 차별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의미화 실천 개념은 문화에 관한 많은 입장들 중에서 내가 공부하면서 가장 정합성이 있는 논리이기 때문에 선택한 입장일 뿐이다. 보다 나은 설명이 가능하면 난 그것을 취할 것이다. 문제는 관으로 접근하지 말자고 하는데 사실 관으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가 의문이다. 그러한 입장은 자기기만일 수 있다. 예컨대 개념을 사용한다고 할 때 개념은 계속 변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경쟁력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서 개념을 공유하지 못하는 게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정정훈 관과 개념은 그 위치설정이 다르다고 본다. 개념은 도구적 방법이지만 관은 어떤 본질적 토대이지 않나. 지금까지 기독교세계관의 담론 안에서 관의 주체는 ‘대문자 주체’였다. 초역사적이고 문화 초월적 보편자의 관점을 제시하려고 해온 것이다. 나는 과연 그 대문자 주체가 가능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위치에 계시겠지만 그의 진리를 특정한 맥락에서 해석하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위치에 설 수 있을까?

정종은 관을 본질적 토대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기본적 입장 정도로 정리해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본적 입장 역시 개념의 고리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서 ‘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내부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포지티브한 방식이 아니라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배제해 나간다면, 우리의 ‘관’이 주어질 수 있다.

정정훈 정종은 위원이 말한 일시적 관점이라는 것도 어떤 사안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공대에서 벌어진 조승희 사건과 같은 사안을 놓고 토론하면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일시적 관점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그러한 구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방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박준용 <복음과상황>이 문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축을 통해서 담론적 개입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적 의제를 설정하고 운동성 있는 얘길 진행해 나가는 것이 한 축이고, 그리고 리뷰가 포기하지 말아야할 다른 한 축이다. 사실 콘텐츠 중심으로 리뷰 하니까 시의성이 있으면 날카로운 지적이 나올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아쉽기는 하다.

정종은 구체성 역시 관의 문제와 연결이 된다. 나는 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보고, 그러려면 관이 분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한국기독교에게 기복신앙은 굉장히 큰 적이다. 교회 내의 독재 문화도 그렇다. 나는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는 대안을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와 목사와의 관계에 대한 인간 대 인간의 합리적 관계…, 이런 것들을 불가하게 만드는 신화적인 구조를 벗겨내는 것이, 교회 문화를 갖고 얘기하자면 나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소수자 문제, 특히 인종주의는 공부하면서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어쨌든 어떤 적이 설정되어야 문제가 터졌을 때 순발력 있게 이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나’가 아니라 ‘우리’의 경우에서는 더욱더.

<복음과상황>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 Beyond 200th

정정훈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꽤 심도 있게 했다. 논의가 때로는 전문적인 면도 있었지만 앞으로 <복음과상황>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구현해나갈 기독교 문화 담론의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 문화 담론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입장을 가정하고, 그것을 단순히 적용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해왔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문화 담론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입장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을 일정하게 확인한 것 같다. 물론 우리에게 기독인이라는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서 문화적으로 구현되고 표현되는 양상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 그러한 다양성과 차이들이 기독교라는 장 안에서 문화적으로 소통되고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복음과상황>의 문화섹션을 통해서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닐까 한다. 결국은 지면들을 통해서 그 방향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진행 정정훈 (본지 편집위원,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leftity@jinbo.net
정리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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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 복음과상황]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