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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er] 경계를 가로지르는 소통의 꿈, 영화연구자 최은

[198호 기독지성 뉴웨이브]
경계를 가로지르는 소통의 꿈, 영화연구자 최은

입력 : 2007년 03월 12일 (월) 15:34:46 [조회수 : 568] 복음과상황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영화연구자 최은. ⓒ복음과상황 신철민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일지 몰라도 세상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늘 관심을 가져온 복음주의 기독교는 ‘영화’라고 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우세종’에 대한 관심을 항상 보여왔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복음주의 영화이론가라고 한다면, ‘유재희’이외에 딱히 떠오른 인물이 없는 것이 또한 복음주의 진영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요즘 복음주의권의 문화판에서 ‘최은’이라는 이름이 종종 발견된다. <복음과상황>의 영화평의 고정필자, 청어람 아카데미 영화이론 강좌의 강사로 복음주의권에 영화연구자로서 자신을 알린 최은은 올해부터는 총신과 장신과 같은 신학대학교에서도 영화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신학적, 교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하거나, 교회성장의 도구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거나, 아니면 도덕적 측면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 복음주의 영화담론에서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 자체의 문법과 언어 그리고 감각에 충실한 영화이론가의 등장은 척박한 복음주의 문화이론 진영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은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며 IVF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화이론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중앙대, 총신대, 장신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청어람 아카데미와 CMF 등에서 영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기독지성의 뉴페이스 코너에서 영화연구자 최은을 만났다.

학부에서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고, IVF에서 열심히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대학교 3학년 때 영화 관련 수업을 하나 들었다. 그때 한편의 영화라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영화만큼 이 시대에 세계관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매체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적어도 그 당시에는, 기독교 진영에서 영화에 대해서 왜 아무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세계관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다. 곧 기독교계에서도 문화운동의 붐이 일어나면서 영화에 대한 담론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낮은 울타리 등 기독교계 문화운동이 있지만 일반 영화계나 문화계에서는 그런 운동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에서도 일반 영화계 혹은 문화계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배척하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가교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영화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았고, 영화공부를 해온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아니어도 누가 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기독교계에서 배척하는 소위 나쁜 영화들, 성이나 폭력을 노출하는 영화라고 할지라도 이런 영화들이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욕망을 보여주는 매체이고, 누군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게 되었다.

영화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IVF에서 받았던 훈련이 영향을 미쳤나?

그렇다. 난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보수적 환경에서 자랐다. 한 동네에서 이사도 안가고 한 교회를 20여 년간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만나온 사람들은 모두 그 기간 동안 같은 데 살면서 만난 알게 된 이들이었다. 주로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IVF에서 훈련받으면서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과 분리된 삶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영화를 공부하게 된 계기에는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원에 갓 입학한 학생이 아니라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지금도 세상에 대한 태도라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을 분석하는 이론적 틀의 기초로서 기독교 세계관이란 문제설정은 유효한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여전히 세계관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세계관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대하는 건 아닌가 한다. 기독교 영화는 기독교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가 중요하니까 아무런 내용적 준비 없이 일단 영상 장비부터 사놓고 보고(웃음). 기독교인들끼리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의 벽들을 허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 못지않게 이 시대의 대중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중요한 거다. 우리는 쉽게 섹스나 폭력이 묘사된 영화를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분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그들 보다 더 우월하고 저들은 우리 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영화에도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세상과 기독교의 괴리감을 더 크게 만드는 것 같다.

처음에 영화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생각이랑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화연구자로서 활동하면서 문화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뀐 건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은 세상과 기독교로 설정된 경계에 대한 문제 제기하면서 그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대학 들어갈 때도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나?

공부를 시작할 때와 지금은 좀 달라졌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기독교인이 뭐라고 말하는지 세상 사람들, 영화 전문가들이 관심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왜 그럴까? 단순히 말해보자. 기독교인이 특정 영화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게 얘기해야 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면 그들이 알아듣는 말로 해야 하는 거다. 그러려면 그들이 어떤 언어로 말하고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지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느낀 것은 나는 여전히 옳고 저들은 여전히 틀리다는 생각 자체를 내가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말하는 방법은 세련돼졌는데…. 나는 일단 옳고 저들은 틀렸는데 어떻게 틀린 걸 온유한 방법으로 꼬집어 비판을 할까라고 생각했던 거지. 지금 생각하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저들을 세련되게 비판하려는 음흉한 방법이었던 것 같았다(웃음). 나는 나의 세계관을 지키면서 어떻게 그들의 언어를 익혀서 그들이 불쾌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꼬집을 수 있을까 하는 야심이 있었지만 공부를 계속 하면서 보니깐 내 마음에는 이미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선입견이 여전히 있더라. 공부는 그런 선입견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론을 공부하다보면 기존의 신앙적 가치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이 이론들이 설득력이 있어서 쉽게 이건 ‘틀렸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지 않나. 기독교 신앙 안에서 당연하다고 전제했던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면서 세계관이 바뀌는 경험들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이론 보다 실천적 문제가 먼저 다가왔다. 내 생활과 관계가 많은데 처음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쟤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 왔을까 하면서 신기해했다. 영화광도 아니고, 영화동아리나 영화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문화센터 영화강좌를 들은 것도 아니고, 또 일상적으로는 술, 담배도 안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괴리감이 있었다. 석사 때 까지만 해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학과 속에서 ‘일단 살아남자’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익숙한 기독교 공동체로 도피하지 않고….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들과 내가 너무 잘 지내고 있더라. 그래서 ‘난 살아남은 건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다양한 소수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동성애자나 여성주의자 등등….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사람들만큼의 역동성도 없구나’라는…. 오히려 이들에게 배워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 가운데서 그냥 살아남는 것이 다는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화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소수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이론적 면에서는 어떤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분명 들지만 실천적 차원에서는 그들로부터 수용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 역동성을, 혹은 그 이상의 역동성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에 대한 생각을 좀 짚고 넘어가자. 기독교인이 소수자의 정체성을 옹호해야 한다는 차원의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인의 정체성이 소수적인 것이어여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기독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보편적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동일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지만 소수적 정체성은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동일화를 비판한다. 만약 기독인이 소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적 동일성으로 내세우면 않되는 거 아닌가?

실천적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기독인의 정체성이 보편적인 동일성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문화적 차원에서는 기독교인이 다수자로서 보편성을 주장하거나 그것을 이미 획득한 존재라고 보는 게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말 성경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보면 성경의 관점대로 살아가는 방법은 너무 힘들고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고 정말 소수적일 수밖에 없는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해의 출발점인 것 같다. 동일성, 보편성의 문제를 영화의 맥락에서 본다면 할리우드 영화를 그런 사례로 제시할 수 있다. 기독인들은 헐리우드의 감동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이 하나의 보편적 동일성을 띈 영화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영화만 봐야 된다는 생각, 건전한 영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영화만 신앙에 부합한다는 생각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거다.

   
 
  ▲ ⓒ복음과상황 신철민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소위 ‘좋은 영화’ 뿐 아니라 ‘나쁜 영화’도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설교에서 <바람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가족이 해체되는 악한 세태를 반영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 영화를 예로 들었다. 그 영화에 나오는 가족은 콩가루 집안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일정 정도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인권변호사이지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선 무관심한 남자 주인공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람난 가족>은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지도 않고 ‘나쁜 영화’라고들 한다. 또 야한 영화이기도 하고.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런 영화들을 보지 말라고들 한다. 혹은 보면서는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면 그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못 보게 된다. 야한 영화가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 주목하면 영화의 다른 측면을 못 보는 게 더 많다는 거다. 표면적인 것만 보지 않고 이면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야한 것만 찾아내는 영화에서 다른 걸 찾아낼 수 있는 신앙인의 영화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IVF에서 귀납적성경공부(PBS)를 배우면서 내가 뭔가 문제제기를 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배웠다. 영화를 보면서 갈수록 느끼는 건 하나의 텍스트를 분석한다는 차원에서 PBS와 영화보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왜 이 장면은 이렇게 구성했을까? 왜 이런 방법으로 이미지를 사용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의도를 물어봐야한다는 거다. 성경을 공부하는 거랑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화를 잘 볼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지 않을까.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은근한 자신감이 있다. 남들이 못 보는 걸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더 나가자면 그에 대한 성서의 응답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너무 쉽게 ‘나쁜 영화’라고 딱지 붙이고, 못 보도록 차단해서 세상과 진지한 소통의 지점을 막는 거 같다. 소위 ‘나쁜 영화’들이 때로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면 스탠리 큐브릭이나 우디 앨런의 영화도 그렇다. 특히 난 우디 앨런을 좋아하는데 그 안에 굉장히 냉소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이 사회에 대한 고민과 애정을 가지고 있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애정, 삶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는 게 읽혀진다.

최은이 생각하는 ‘나쁜 영화’는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나쁜 영화’와는 좀 다르다. 그때의 나쁜 영화란 영화의 주제 의식이나 문제를 풀어가는 영상언어 보다는 소재나 내용들이 기독교인들이 설정한 어떤 금기를 건드리는 영화들이다. 가령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제기한다던가. 하지만 당신이 말한 ‘나쁜 영화’들, 우디 앨런이나 임상수 등은 일반 영화평단에서 긍정적 평가를 얻기도 한다. 

사실 그런 ‘나쁜 영화’는 기독교인들만 유독 안 본다(웃음). 

하지만 정말 필름 낭비한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대중의 잠재적 욕망을 읽을 수 있는 지점이 많지 않나? 비디오 가게에 꽂혀있는 에로 영화들 자체도 그 시대의 성적 욕망의 배치를 읽어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원단 나쁜 영화에서도 뭔가 읽어낼 수 있다면 ‘정말 볼만한 가치가 없는 영화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좋은 영화는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지지하는 영화와 반대하는 영화는 어떻게 구분되나?

일관된 관점을 가진 영화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만든 영화인지가 분명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한다. 반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을까 싶은 영화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만 모아놨는데 재미도 없는 영화들은 좀 아니다 싶다. 영화적 일관성이 없거나 완성도 떨어지는 영화들, 정말 못 만든 영화들은 사실 용서가 안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가보자. 어떤 감독의 영화를 옹호하고 싶은가? 다시 말해 좋아하는 감독이 있나?

아까 말했듯이 우디 알렌, 우리나라에서는 장진이 괜찮다. 블랙코미디를 좋아한다. 우디 알렌은 세상을 한발 떨어져서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자기가 들어가 있다. 자기의 치부나 약점이 영화에 드러난다. 그의 영화가 좀 자전적이지 않은가. 완전히 세상에서부터 초월해서 세상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 대한 애정과 비판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세상을 새롭게 보는 통찰을 그의 영화는 제공한다. 이 사람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 사람의 개성이나 작품세계의 일관된 측면도 좋고…. 나이 들어가면서 귀여워지기도 하고(웃음). 그게 아마 홍상수 영화랑 다른 점이 아닐까. 그의 냉소에는 애정이 없다. 자기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에 대한 애정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 없다. 블랙코미디 형식을 좋아하는 건 세상에 대한 관점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웃음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뭔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형식이어서다.

영화자체에 대한 예술적, 미학적 완성도 못지않게 이 영화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맺는 의미가 뭔가 고민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는 대중영화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예술영화나 미학적 성취를 이룬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나도 베르송이나 브레히만의 영화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네마데끄운동도 중요하고. 이미지를 통해서 사유하게 만드는 정말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한테 그런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지만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다. 그리고 반드시 그런 영화들만 보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능한 그런 영화를 보면 좋겠고 나도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상업 영화를 보는 대중들, 혹은 영화의 대중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대중영화를 통해서 이 시대를 읽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는 사실 영화사의 고민이기도 하다. 예술로서의 영화와 상품과 대중문화로서의 영화. 영화를 예술로서, 영화를 언어로서 규정하려는 이론이 점차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서 파악하는 이론으로 변해 오기도 했다. 대중성이 가지는 문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이다. 기독교인이 영화를 만든다면 예술영화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상업영화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나. 물론 같이 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복상에 기고한 당신의 영화평은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당신이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 심오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영화는 영화만의 언어가 있다는 거다. 영화 자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아무리 내용이나 주제만 가지고 말해서는 통하겠냐는 거다. 영화가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어떻게 짜여 가고, 어디서 실패를 했고 이런 문제를 영화 언어의 차원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줄거리만 따라가지 말고 주제만 보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이미지를 사용했고, 그 이미지들 가운데 어떤 함의들이 있는지 보자는 거지. 영화는 영화만의 언어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거다. 그 언어, 이미지를 정확하게 이걸 읽어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화언어에 대한 이해 없이 영화를 내용이나 주제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영화는 A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B를 읽어내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겠나. 그래서 영화 언어를 제대로 읽어보자, 혹은 이미지를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요즘 헐리우드의 흐름이 기독교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나 <네티비티 스토리> 혹은 <나니아 연대기>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헐리우드가 이제 기독교를 새로운 상상력의 소스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단순히 상상력의 차원이기만 할까? 영화사를 보면 50년대에 <벤허><쿼바디스><십계> 등과 같은 소위 기독교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헐리우드는 자본과 산업에 논리가 강하다. 50년대에 그렇게 큰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졌을까? 물론 1, 2차대전 이후 보수적인 분위기라든가 텔레비전이랑 경쟁하려니까 영화가 다양한 스펙터클 만들어냈어야 했고. 그런 것들이 맞아 떨어져서 큰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 져야 했던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처음에 만들어놓은 영화의 거대한 세트나 소품들을 재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 엄청 들인 세트나 소품을 놀릴 수 없었던 거지. 헐리우드의 영화 트랜드는 자본의 논리와 밀접한 상관이 있는 거다. 최근에 워너브라더스나 소니 등에서 한 해에 10편씩 기독교 영화를 만들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런 발표가 나오게 된 이유는 그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나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기독교’ 영화들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헐리우드 영화 자본이 기독교가 시장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헐리우드의 시장은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 그 세분화된 시장에 기독교가 포착된 것이다. 나는 사실 좀 걱정된다. 헐리우드가 만들 기독교 영화에서 기독교 영화의 의미는 무엇이 될지, 또 그런 영화들을 교회에서 계속 소비하게 될 텐데, 그때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영화는 어떻게 이해될지….

기독교 예술영화도 중요하겠지만 기독교 상업영화도 필요하단 얘길 했는데 사실 이게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고민하면 상이 잘 안 그려지는데…

사실 그렇다. 나도 고민 중인 문제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건 정말 합리적인 방법으로 스탭을 구성해서 제대로 된 임금주고 인격적 대우 해주면서 팀을 꾸려서 일을 한다거나. 이렇게 하면 어떤 영화를 만들지 간에 일하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결과도 그렇지만 과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흥행에 성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제작과정에서 제대로 된 케이스가 없기 때문에 이걸 꼭 기독교인이 했으면 좋겠다. 그(기독인들이 하는) 영화사는 다르다. 그 영화사에서 제공하는 제작 환경은 다르다는 이야기가 영화판에서 들리게 된다면 좋겠다. 영화 자체의 측면에서는 보자면…. 어제 본 <좋지 아니한가>란 영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말아톤>을 만든 장윤철 감독의 영화인데, 사실 난 말아톤을 보면서는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기독교적인 영화가 꼭 저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좋지 아니한가>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었다. 완성도의 차원에선 아쉬운 점이 많지만…. 감독이 크리스천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옹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웃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 다섯 명의 가족들이 냉담한 관계 속에서 결속력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그냥 흔해 빠진 가족 드라마의 형식이 아니다. 각 캐릭터의 연결되는 얼개는 약하지만 원조교제, 교육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 의식을 던지고 있다. 그런 문제들의 해결 지점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에 생각해 볼만한 문제들을 던지고 있고, 영화 언어의 차원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냥 한번 웃거나 울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메시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한 영화를 그리스도인들이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꼭 감동적이지 않아도 좋고 누가 봐도 당연히 옳은 게 아니어도 좋고. 재밌거나 유쾌할 수 있고 때론 잔인하거나 야할 수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쁜 세상, 착한 사람들의 얘기가 다가 아니고 그렇게 하면 오히려 못 보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도 도발적 얘길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성찰할 내용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영화적 미학과도 통하는 건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기독교적 미학’이라고 할 만한 시각적 이미지든 서사든 간에 그런 기준이란 게 적어도 이런 게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상이 있나? 

난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실 그렇게 규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내 생각이었던 것 같고, 그렇게 또 하나의 테두리를 만드는 것, 이건 기독교적이고 어떤 것은 아니고. 이건 봐도 괜찮고 저건 안 되고.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규정하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그런 발상이 내가 보기에는 위험한 발상인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다른 테두리를 만들고, 또 하나의 해결 불가능한 지점을 만들어내게 되고….

요즘 개봉하는 영화 중 복상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사실 3,4월은 영화계의 비수기다. 볼만한 영화가 뭐가 있을까? 아까 이야기했던 <좋지 아니한가>는 지지해주고 싶은 영화다.

글·정정훈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본지 편집위원) leftity@freechal.com
사진·신철민 기자

최종편집 : 2007년 03월 17일 (토) 01:58:46  


* 본 기사는 복음과상황의 제휴관계에 따라 제공된 컨텐츠 입니다. 관련 정보 및 다른 기사는 복음과상황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 출처 : 복음과상황]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62